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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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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창  이회창
 이회창
은 대한민국의 법관 출신 법조인, 교육인, 정치인, 법학자이다. / South Korean politic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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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Biography

KOR: 이회창(李會昌, 1935년 6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법관 출신 법조인, 교육인, 정치인, 법학자이다. 황해도 서흥군에서 태어났고, 부친과 선대의 고향인 본적지는 충청남도 예산군이다. 1960년 서울지방법원의 법관으로 임용되어 1993년 대한민국 대법원 대법관으로 퇴직하였다. 법관 초기 조용수 오판 사건의 판사 가운데 한명으로 참여하였으나,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서는 정권의 요청을 거절하는 등 기피인물로 선정되어 1986년 4월 대법관직에서 퇴임하였다. 군사정권의 청탁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판결을 내려 '대쪽', '대쪽판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88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복귀하였으나 노태우 정부의 선거 개입과 부정선거를 질타하고 법관직을 사퇴하였다.

1993년 2월 25일부터 1993년 12월 16일까지 제15대 감사원장, 1993년 12월 17일부터 1994년 4월 21일까지 제26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한나라당 소속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2번 출마하여 2번 낙선하였고, 2007년 11월 7일에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 무소속 후보로 제17대 대선에 출마 의사를 발표하며 정계에 복귀하였다. 2008년 보수정당인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여 당 총재와 대표를 역임하였다. 호는 경사(徑史)이다.

 

생애 - 생애 초기 - 출생과 가계

이회창은 1935년 6월 2일 법관 집안 출신으로 검사 출신인 이홍규(李弘圭) 옹과 김사순(金四純) 여사 사이에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로 그는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의 넷째 아우 주부공(主簿公) 이영습(李英襲)의 23대손이었다. 일설에는 왕족의 후손이라는 설이 한때 돌았으나 이영습은 이성계의 종고조부로 이회창은 왕실의 후손은 아니었다. 이영습은 고려 대장군 이양무의 넷째 아들이자, 이준의·이의방 형제의 종손(從孫)이었다. 그러나 이영습의 후손들은 왕실의 직계가 아니었으므로, 조선 건국 이후에도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받지 못하였다.

주부공 이영습의 증손자인 이세분(李世芬)은 조선왕조 개국공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냈다. 주부공의 6대손이자 이총재의 17대조인 우계당(牛溪堂) 소생(紹生)은 단종 때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냈는데,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예산군 대흥면 우정촌(현 교촌리)에 은거했다. 이것이 이총재 가문이 예산에 자리잡게 된 배경이다.

이후 몰락했지만, 그의 집안은 구한 말에 다시 부호가 되었으며, 예산의 금오산 일대 중 대부분이 그의 집안 재산이었다. 이회창의 할아버지 이용균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이름있는 저명한 한학자였다. 그의 둘째 큰아버지(仲父, 중부) 이태규는 한국 최초의 화학 분야 전공 이학박사이다. 이태규는 이회창의 두번째 숙부로 1992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아버지 이홍규는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강점기 후반 검찰서기로 임용,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8·15 광복 이후 검사로 임용되어 법관으로 근무했다. 이회창은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고, 부친 이홍규와 선대의 고향인 원적지는 충청남도 예산군이다.

 

유소년기

아버지 이홍규는 해방 직후 검사로 활동했는데, 퇴직 이후에는 공증인과 변호사로 활동했다. 어머니 김사순의 여동생인 김삼순은 저명한 학자였고, 외삼촌인 김홍용(金洪鏞), 김문용(金汶鏞)은 2대 국회의원, 김성용(金星鏞)은 제6대, 제7대, 제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부친의 발령지에 따라 이주하여 서너살땐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살았다. 유년기의 이회창은 말수 적고 얌전한 아이였었다. 유년기에 그의 부모는 외가가 있는 광주로 이주하여 광주광역시에 있는 광주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때 '중학입학자격 검정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며, 졸업 후 광주시 광주서중학교에 합격하였으나 법관이었던 아버지 이홍규가 청주시로 발령되어 충청북도 청주중학교로 전학갔다. 그 뒤 다시 경기중학교로 전학갔다. 17세때는 아버지가 모함으로 구속되자 소년가장이 돼 가족을 부양하면서 주린 배를 찬물로 채웠다 한다.

 


6.25 전쟁과 사춘기

6·25전쟁 직전 경기중 4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였던 아버지 이홍규가 '남로당원을 무혐의로 풀어 줬다'는 이유로 수갑이 채워진 채 연행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버지가 끌려가는 직접 목격한 뒤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의 도움으로 곧 풀려났다. 이러한 연유로 아버지 이홍규는 장면의 인도로 카톨릭에 귀의하였고, 그의 집안은 카톨릭 신자 집안이 되었다.

아버지 이홍규는 한 자유당 간부의 청탁을 거절한 일로 이 자유당 간부로부터 좌경, 용공으로 몰려서 고초를 겪었으나, 장면의 후원으로 아버지 이홍규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아버지 이홍규가 내사를 당하는 동안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되다시피 했고, 청소년기의 이회창은 방황하였다. 경기중학교 졸업 후 이회창은 경기고등학교로 입학했다. 중고교 시절의 이회창은 주로 독서에 취미를 붙였다.

그 뒤 아버지 이홍규는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복귀했다. 1956년 당시 부통령 장면이 시공관에서 피격되자 적극적으로 수사하여 배후를 찾아낸다. 이홍규는 9·28 사태 수사에 공을 세워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을 파헤쳐 척결검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대학 시절

카톨릭에 귀의하여 올라프 라는 세례명을 받고 신자가 되었다. 그는 경기고등학교 내내 상위권 성적이었으며, 졸업 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1957년 2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학구파였던 그는 학창시절 내내 학업에 정진하였고, 동시에 사법시험을 준비하였다. 서울대학교 법대 재학 중인 1957년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곧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하여, 1957년 6월 공군 장교로 임관, 공군 본부 법무감사관실 법무관을 지내고 1960년 공군 예비역 대위로 예편하였으며, 제대 후 법관으로 임용되었다.

 

약력

  • 1950~1953년 경기고등학교
  • 1953~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 학사
  • 1957년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서울대학교 법학과 4학년)
  • 1957년 공군 입대
  • 1957년 6월~1960년 공군본부 법무감사관실 법무관(공군 대위)
  • 1969~1970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 수학
  • 1969~1970년 하버드대학교 / 수학
  • 1985년 5월 9일 청조근정훈장
  • 1981~1986년, 1988년~1993년 대법관
  • 1988~1989년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1993~1993년 제15대 감사원장
  • 1993~1994년 제26대 국무총리
  • 전주이씨 주부공파 종친회 고문
  • 1995년 4월 4일 국민훈장 무궁화장
  • 1995년 11월 가톨릭대학교 발전후원회 회장
  • 1996년 5월 서울대학교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 상 수상
  • 1997년 신한국당 대표, 총재 역임
  • 1997년 7월 신한국당 상임고문
  • 1997년 7월 러시아 극동국립대학교 블라디미르대학 명예법학박사
  • 1997년 9월 올해의 베스트드레서 상 수상
  • 1997년 11월 21일 양당 합당합동회의를 통해 새로 출범한 한나라당의 명예총재 및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추대
  •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2위(1위 김대중)
  • 1998년 2월 4일 미국 버클리대학교 특별명예상
  • 1998~2002년 한나라당 제2,3대 총재
  • 제15,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출마,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2위(1위 노무현)
  • 2002년 정계 은퇴
  • 2003년 2월~2004년 3월 미국 후버 연구소 명예교환교수
  • 2006년 정계 복귀
  • 2007년 한나라당 탈당
  •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출마, 무소속, 3위(1위 이명박, 2위 정동영)
  • 2008년 정통보수정당을 표방하는 '자유선진당' 창당
  • 현재 (사)전주이씨대동종약원 고문

 

출처

 

 

ENG: Lee Hoi-chang (born June 2, 1935) is a South Korean politician. A Catholic, he was born to an elite family in Seoheung, Hwanghae (part of what is now North Korea), but grew up in the south after his father, a public prosecutor, was appointed to a new post.

Like his father, Lee studied law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and became a judge at the age of 25. He became the country's youngest-ever Supreme Court judge at the age of 46. Lee was nicknamed "Bamboo", a Korean term for an upright person of principle.

 

Political career

In 1988 Lee was appointed chief of the National Election Commission and in 1993 he headed the Board of Audit and Inspection under President Kim Young-sam. Subsequently he was appointed prime minister the same year, but resigned after a few months, frustrated at the lack of real power in the mainly ceremonial position.

In 1996 he led the parliamentary campaign of the then-ruling New Korea Party (NKP), which merged with another party to become the current Grand National Party (GNP) in 1997. Lee was elected as his party's presidential candidate for the presidential election scheduled for that same year. Although at the outset he seemed destined for victory, Lee ultimately lost to Kim Dae-jung in the midst of Asian economic crisis. His campaign was also tainted by accusations that his two sons avoided compulsory military service by deliberately losing weight before their induction medical examinations.

Lee again campaigned to win the presidency in 2002. Although corruption scandals marred the incumbent government, Lee, unable to cope with his opponent's youthful and vigorous campaign strategy, lost this time to Roh Moo-hyun, Kim Dae-jung's successor. Lee subsequently announced his retirement from politics.

Lee's platform for both elections was consistent with the basic tenets of South Korean conservatism which included a tough stance toward North Korea, market-oriented and pro-business economic policies, and cracking down on illegal strikes. Lee and his party repeatedly criticized Kim Dae-jung's "sunshine policy" and insisted that financial aid to North Korea be cut off until nuclear weapon program was dismantled.

On November 7, 2007, Lee officially announced his third campaign for the South Korean presidency as an unaligned candidate after quitting the GNP. He ran against GNP candidate Lee Myung-bak, UNDP contender Chung Dong-young, and Moon Kook-hyun. Lee's presidential bid posed a concern to the conservatives who were eager to regain the presidency after a decade of leftist rule, as it was feared Lee's candidacy would divide the conservative vote. However, Lee came third, with 15% of the vote, and the GNP candidate Lee Myung-bak was elected.

After his failed 2007 election bid, Lee founded the Liberty Forward Party.

 

Source

 

 

February 27,2013

icon Lee Hoi-chang (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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